크로우의 장 : 2-8

Mar 29, 2023

-성 밖 전장-

나는 온 힘을 담아 켄지의 심장을 노려 낫을 휘둘렀다.

 

마음속에서 추억이 반짝이며 밝게 빛나던 소중한 일상이 떠올랐다…

 

-퀸즈 아일, 레갈리아 상업 지구-

북적거리는 퀸즈 아일의 레갈리아 상업 지구 위로 황금색 태양 빛이 쏟아졌다. 풀잎과 나무 위에 내린 아침 이슬이 따뜻한 햇빛에 마르고, 사람들은 상점가를 오갔다.

 

의상점 안에는 군청색부터 순백색까지 형형색색의 드레스가 진열돼 있었다.

 

저거 하나는 괜찮네! 나는 깃털 장식이 나풀대는 검은 드레스를 보고 두 눈을 반짝였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가자, 크로우”

 

그 말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자, 켄지가 몸을 굽혀 드레스를 쳐다봤다.

 

“까만 걸 보고 있었나?”

 

드레스에 목숨이 달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무게도 상당하고 천 조각이 많이 달려서 불편해 보이는데. 저런 걸 입으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해. 우리 같은 사람한테는 치명적이다.”

 

“그래도…”

 

고개를 숙이니 사이즈도 안 맞는 린넨 블라우스와 낡은 갈색 바지가 보였다. 켄지의 숲속에서 드레스를 입고 동물들과 함께 빙글빙글 돌고 폴짝대며 뛰노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도”는 무슨. 가자.”

 

마지못해 애완동물처럼 켄지에게 끌려가며 진열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퀸즈 아일, 해적 야영지-

 

따뜻한 밤하늘에 해가 진 자리를 대신해 초승달이 떠올랐다. 옅은 빛이 어둠의 장막을 밝히며 퀸즈 아일을 감싸 안았다.

 

섬 외곽에 있는 숨겨진 만, 나는 소리를 죽이고 해변가에 있는 야영지를 향해 다가갔다. 파도가 출렁이며 부서지는 소리에 몸을 숨겨 자세를 낮추고 나무 상자 뒤를 지나쳤다. 모닥불의 옅은 불빛이 길을 비췄다.

 

‘저기 있네!’

목표물이 보였다.

 

‘탁자에 있는 보석 반지. 맞지?’

의뢰인이 되찾아달라고 한 그 물건이었다.

 

하지만 해적 다섯이 탁자 위에 놓인 반지를 비롯해 무릎, 발 주변과 무릎 위에 약탈한 보물을 둔 채로 지키고 있었다. 사방에 널린 보물. 전부 다 집을 순 없어도 금화 몇 개쯤이라면…

 

술에 취한 해적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생각을 멈췄다. 한 명 한 명이 다 땀을 줄줄 흘리는 육중한 몸으로 맥주잔을 거칠게 흔들며,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며 살인을 자랑하고 있었다. 우웩!

 

정면에 보이는 두 놈은 단검이 꽂힌 칼집을 허리춤에 여러 개 차고, 한 놈은 느슨하게 머스킷을 쥐고, 다른 하나는 옆자리 모랫바닥에 피 묻은 장검을 꽂고 앉아 있었다.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마지막 한 명은 무기가 없어 보였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선택하자… 켄지한테 배운 대로…

 

‘기습할까? 잘 먹힐 것 같은데. 단검 찬 녀석 하나를 벤 다음 표창을 던져 켄지과 위험한 무기니까 주의하라고 했던 장검이랑 머스킷을 제압. 그러면 나머지 둘도 반응하기 전에 칠 수 있겠지.’

 

말로는 쉽지만, 완벽하게 숨을 끊어야 했다… 빗맞으면 어떡하지?

 

켄지는 반드시 확신할 수 있을 때만 무기를 휘두르라고 했다. 생존을 최우선에 둬야 한다고.

 

‘어떻게 하지? 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 켄지는 인내심이 사냥꾼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했어.’

 

녀석들이 잠들 때까지 참고 기다리자. 몇 놈만이라도 잠들 때까지. 하지만 몇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그만큼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ㅇㅇ

나처럼 잘 훈련받은 사람한테 육체적 능력, 수분 공급, 집중력 유지 같은 건 별문제가 아니었다. 집에 늦게 들어갔을 때 일어나는 일이 진짜 문제지. 켄지가 날 반으로 찢어 버릴 거야!

 

아니면 엄청나게 성을 내며 며칠 동안 굶길지도 모른다.

 

아무튼 혼자서 이렇게 위험한 임무를 하러 나온 건 처음이었다…

 

실패의 대가는 죽음이다. 그건 분명하게 알았다.

 

하지만 죽음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켄지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화를 내려나? 성공하면 내 가치를 증명할 수 있지만, 실패한다면…

 

‘아냐,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임무를 완벽하게 처리한 다음, 반지랑 금화 몇 푼 집어 들고 살아서 집에 가자고!’

 

나는 인내심을 품고 기다렸다.

단검을 찬 해적 둘이 일어나 자리를 뜨며 비틀비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시야에서 놈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기다리는 동안 심장은 빠르게 요동치고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머스킷을 찬 녀석, 장검을 끼고 있는 녀석과 제일 가까이 있는 놈만 남았다. 제발 무기가 없어야 할 텐데.

 

기회의 순간이 온 것이다.

 

‘지금이야!’

 

나는 단검과 표창을 들고 어둠 속을 지나 가장 가까운 해적의 뒤쪽으로 달려들며, 머스킷 해적과 장검 해적의 목을 노리고 표창 2개를 던졌다.

 

하지만 장검 녀석이 날 발견하고는 동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표창 하나가 간발의 차로 몸을 피한 머스킷 해적의 어깨를 스쳤지만, 다른 표창이 손에 적중했다. 녀석은 울부짖으며 모랫바닥에 머스킷을 떨어뜨렸다.

 

‘완벽하지 못했어!’

 

‘얽매이지 말고 집중하자!’

 

놈이 일어나 돌아서서 나를 마주보기 전에 끝장내야 했다.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살인마처럼 목을 노리고 단검을 던졌다.

 

탕!

허공에 연기가 퍼지고, 해적이 나를 보며 누렇게 썩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탕!

 

왼팔이 커다란 충격에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며 단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극심한 통증이 뒤를 이었다.

 

‘무기를 들고 있었어… 망할, 초보자나 하는 실수를! 이 멍청아!’

 

‘이제 어쩌지?!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무기도 없어…’

 

‘도망치자!

 

해적들을 뒤로하고 피에 흠뻑 젖은 팔을 움켜쥔 채 야영장에서 달아났다.

 

탕!

 

다리에 제대로 힘을 줘 뛰기도 전에 또다시 등과 배에 엄청난 충격이 강타했고, 나는 파리가 땅에 떨어지듯 그대로 쓰러졌다.

 

너무나 큰 고통에 한마디 말조차 뱉을 수 없었다. 입을 크게 벌렸지만 비명 지르지도 못하고, 배를 감싼 채 땅바닥 위에서 움찔거리기만 했다. 그런 내 위로 다섯 개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함, 욕설, 웃음이 공중에 퍼졌다. 화약, 맥주, 고기, 그것도 모자라 금화까지 비처럼 내게 쏟아졌다. 해적들이 신은 가죽 부츠가 나를 힘껏 걷어차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팔도, 다리도 전혀 움직이질 않았고, 온몸에 뼈가 몇 개나 부러졌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입 안은 피와 진흙 맛만 느껴졌다. 그저 바닥에 널브러진 포대 자루처럼 저항 없이 발길질을 받아 낼 뿐이었다.

 

‘아… 오늘 밤 이 녀석들의 유흥거리는… 나구나…’

‘너무 아파…’

‘이렇게 죽는 건가…?’

‘켄지가 날 찾을까?’

‘켄지…’

‘켄지…’

‘어디 있어요…’

‘날 지켜주겠다고 했잖아요…’

‘켄지…’

 

의식의 끈을 놓쳐 버렸다.

 

정신을 차리자, 켄지가 한 팔로 날 안고 있었다. 공중에 가득한 불꽃과 연기는 모닥불에서 나왔다고 하기엔 너무나 짙었다. 힘없이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게 불타 있었다. 해적들은 모드 숯덩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켄지는 불안해하며 남는 팔로 푸른 불꽃을 일으켜 블러드스톤을 녹였다. 내 몸에 난 상처 위에도 블러드스톤이 붙어서 굳어 있었다. 푸른 불꽃이 내는 빛에 처음 보는 표정을 지은 켄지가 보였다. 슬픔, 후회, 다급함, 절망이 느껴졌다.

 

“드디어 오셨네…”

 

즉시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는 켄지의 얼굴에서 안도하는 표정이 보이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커다란 호통이 떨어졌다.

 

“크로우, 이 망할 자식! 해적은 건드리지 말라고 말했는데!”

 

내 눈가엔 눈물이 고였다.

 

“절 증명하고 싶었어요…”

 

몸에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 죽지 않았구나. 고통과 어둠을 지나 몸이 치유되며 난 오른손을 꼭 쥐면서 말했다.

 

“…싶어서…”

 

쥐었던 오른손을 펴니 금화 한 닢이 나왔다. 맹세하는데, 캔지가 눈물을 흘리는 걸 똑똑히 봤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 드레스를 입고 싶어서…”

 

긴 침묵이 흐른 뒤, 켄지가 부드럽게 날 감싸 안았다. 그의 후회, 안타까움, 사랑이 느껴졌다. 짧지만 소중한 그 시간 동안 마침내 켄지를 이해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포옹은 강렬했던 만큼 금방 끝났다. 켄지는 팔로 눈가를 닦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넌 아직 어린애야.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길러 주겠다고 분명 말했었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안… 안 들어줄 거잖아요…”

 

“들어줄게. 필요한 게 있으면 들어줄 거야. 오늘밤부터는 그렇게 하겠다.”

 

“정말요?”

 

“그래.”

 

고통이 누그러졌지만,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저는 이제 죽는 건가요?”

 

“아니, 크로우. 그건 내가 용납 못 해.”

 

켄지가 내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성 밖 전장-

 

‘손이…’

‘너무 차가워…’

 

덩굴에서 풀려난 여왕님은 조용히 린의 상처를 간호하며 내가 켄지를 무릎에 눕히며 그의 손을 꼭 붙잡는 걸 지켜봤다. 내 낫에 베여 크게 벌어진 상처가 난 켄지의 등에서 푸른 피가 흘러나왔다.

 

소중히 아끼는 검은 드레스에 푸른 피가 얼룩을 남겼다.

 

해적과 싸운 그다음 날에 켄지가 사준 드레스였다.

 

켄지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군.”

 

내 얼굴에서 비처럼 주르륵 떨어지는 눈물이 켄지의 가슴팍에 떨어졌다.

 

“울지 마라…”

 

“죽는 거예요…?”

 

켄지는 내 눈을 보며 단념하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누구도 맹세의 서약에 맞설 수는 없어. 하나 이젠 괜찮아. 네가 몸 하나는 스스로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용감해졌으니까. 안심…”

 

“더 말하면 안 돼요!”

 

켄지가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미안하다, 크로우. 난 모든 걸 잘못했던 걸지도 몰라.”

켄지는 잠시 말을 멈추곤 하늘을 올려다봤다.

 

“드디어 자유를 찾았구나, 크로우. 어디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향해 훨훨 날아가라. 멀리 날아가, 크로우…”

 

“안 돼요!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난데, 내가⁠—”

 

눈물을 닦으며 켄지의 눈을 바라봤지만,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은 더는 켄지에게 전해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두 눈엔 빛이 사라지고 회색 연기로 헤진 전장의 하늘이 새겨져 있었다.

 

켄지가 죽었다.

 

날 기르고, 고문하고, 보호하고 했던 사람. 트라우마를 심기도, 목숨을 구해 주기도 했던… 날 사랑해 준 사람이 죽었다.

 

비가 쏟아지듯 뺨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 힘없이 뒤를 돌아 여왕님과 린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왕님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정신을 찾은 린은 두 눈에 서러움을 가득 담고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바라봤다. 

 

사랑과 자유란 너무나도 아픈 것이란 걸 알게 됐다.

 

두 줄기 눈물이 켄지의 옷을 타고 흘러 내 허리춤에서 만났다.

 

나는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소맷자락이 깃발처럼 바람에 휘날렸다.

 

C.E. 997 봄

 

세실리아와 니어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고함과 통곡,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낫에 묻은 피를 털면서 날렵하고 위협적으로 움직이는 귀족 소녀를 주시했다.

 

‘저 애는 자유로울까? 사랑받고 있을까? 자기가 원해서 이 생지옥에 나와 다른 이를 죽이는 걸까? 내가 저 아이를 죽이면, 내가 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 아이를 위해 눈물 흘릴 사람이 있을까?’

 

가까이 서서 소녀를 마주하자, 소녀의 눈에서 익숙한 슬픔과 씁쓸함이 느껴졌다.

 

기사들의 고함에 나는 정신을 다잡았다.

 

나는…

 

[…두 팔을 벌려 소녀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