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로우의 장 : 2-7
Mar 14, 2023
-성내-
발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린을 따라 나선형 계단을 타고 걸어 올라갔다. 린을 몰래 따라가는 동안, 린이 자기 방으로 가는 게 아니란 걸 눈치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이 빙글빙글 반복되며 알 수 없는 곳으로 이어졌다.
아래쪽 전장에서 튀는 전쟁의 불꽃이 끝도 없이 반복되는 창문에 반사되어 비치는 걸 보며, 마음속에 투지와 불안함이 교차했다.
‘린이 어디로 가는 거지?’
마침내 복도 끝에 다다르자 문이 세 개 보였다. 둘은 닫혀 있었으나, 나머지 하나는 마치 들어오라는 듯이 반쯤 열려 있었다.
나는 반쯤 열린 문을 살며시 밀며 린을 불렀다.
“린, 여기 있어?”
문 안쪽엔 익숙한 침실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부드러운 벨벳 누비이불로 덮인 침대,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물병과 황홀한 맛이 나는 케이크 한 조각을 온전히 담고 있는 은 접시가 놓인 탁자, 성과 그 아래 전장을 내려다보며 깜빡이는 불꽃을 반사해 비추는 창문, 햇살에 빛을 내며 반짝이는 작은 물건이 보였다.
난 반짝이는 물건이 뭔지 제대로 보기 위해 나도 모르게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쾅!
그러자 방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혀 버렸다.
섬뜩함에 소름이 돋은 나는 서둘러 방문을 열어 보려 했지만, 문은 꼼짝하지 않았다.
“뭐야…?!”
방문을 있는 힘껏 두들기자,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로우, 미안해.”
“린?”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수도 없이 봤어. 더는 보고 싶지 않아. 네가 눈물 흘리는 것도, 자기 자신을 서서히 죽이는 것도 더는 보고 싶지 않아. 이번엔 내가 널 지켜줄게.”
“린, 안 돼!”
“얌전히 그 안에 있어, 나만의 작은 새.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데리러 올게. 식탁에 네가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도 가져다 놨으니까… 착하게 있어.”
무슨 말을 뱉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곁에 남은 거라고는 공허한 방에 울리는 전장의 메아리뿐.
-성 밖 전장-
흙먼지가 가득 휘날리는 전장, 성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곳에서 공중에 뜬 여왕이 켄지를 내려다봤다.
“그동안 잘 지냈나, 푸른 불꽃?”
푸른 불꽃으로 된 칼날이 허공에서 쨍그랑거리며 푸른 재를 털어냈다.
“잡담할 생각 없어.”
여왕이 양손을 들어 박수 치자 발밑의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럼 뭐 하러 온 거지? 맹세의 서약에 갈가리 찢길 걸 알면서 왜 그토록 싫어하는 이 도시를 찾아왔어? 상처 입은 동물도, 쓰러진 나무도 안 보이는데.”
“답을 뻔히 알면서 그런 멍청한 질문 하지 마.”
켄지가 여왕을 노려보며 답했다.
여왕은 크게 웃으며 두 팔을 크게 펼쳤다.
“나의 배우자여, 어디 한번 날아 보자고.”
여왕이 날개를 활짝 펼치자 셀 수 없이 많은 불꽃 깃털이 쏟아져 마치 단검처럼 켄지를 향해 빗발쳤다. 켄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서서 깃털을 기다렸다. 가까이, 더욱더 가까이 날아온 깃털이 거의 얼굴에 닿을 것 같은 순간, 켄지는 손바닥을 들었고, 깃털은 밝게 빛을 내는 푸른 가루가 되었다. 가루가 흩날리며 떨어지는 동안 켄지는 씨익 웃음 지었다.
“날아올라 봐야 다시 땅에 처박힐 뿐일 텐데! 봉인이 드디어 풀렸는데도 홍련은 쓰지 않을 생각인가?”
“흥! 다행인 줄 알아. 소중한 이 도시가 없었다면 벌써 타 죽었을 테니까.”
“입은 살았군. 그럼 ‘성스러운’ 게임을 계속 해 보실까!”
한순간의 빛처럼 켄지의 모습이 사라졌고, 푸른색 불꽃 칼날이 눈 깜짝할 새 초승달을 갈랐다. 여왕은 피의 대못을 소환해 온 사방으로 발사했다. 켄지가 순간순간 몸을 보이며 재빠르게 날아오는 대못을 피했다. 대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여왕은 날아오는 초승달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고, 피할 수 없는 공격을 막기 위해 피의 막을 펼쳤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칼날처럼 날이 선 달은 보호막을 꿰뚫으며 여왕의 하얀 드레스를 따라 그녀의 옆구리를 베어 버렸다.
튕겨지듯 손으로 돌아오는 칼날을 집어 든 켄지는 하늘에 떠 있는 여왕을 비웃었다. 상처를 누르는 여왕의 손에도 불구하고 고귀하며 붉은 피가 하얀 드레스를 물들였다.
“달라진 것도 없이 아직도 아둔하고 약해 빠졌어! 11년 전 홍련을 제대로 조절하기만 했으면 노바 대화재도, 나와의 타협도 없었을 텐데, 그걸 다 잊었나?”
켄지의 푸른 화염이 일렁거렸다.
“이제 땅으로 내려와 진짜 여왕처럼 싸우지 그래?”
순간 여왕이 눈을 찡그리자 용을 닮은 눈동자가 주홍색 빛을 발했다.
“그 입 닥쳐!”
어느새 회복된 상처에서 손을 뗀 여왕이 큰 화염을 일으켰다. 이 세상 모든 이, 모든 것을 재로 불살라 버리고도 남을 거칠고 사납기 그지없는 불길이 여왕의 손바닥 위에서 피어났다. 피할 수 없는 불길에 켄지는 칼날을 땅속 깊숙이 박아 넣었고, 푸른 빛의 구체가 켄지를 감싸며 여왕의 불길을 막아 세웠다. 여왕의 용을 닮은 눈동자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채 켄지 위로 쏟아지는 화염을 지켜봤다.
“난 달라졌어!”
울부짖는 여왕의 목소리에 찢겨 나가는 것처럼 푸른 보호막이 산산조각 났다. 뒤쪽으로 몸을 날리는 켄지가 여왕이 내뿜은 지옥 불을 향해 푸른 화염을 쐈지만, 여왕의 불길에 압도당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여왕은 맹렬하게 날갯짓하며 쏘는 화염이 켄지 위로 쏟아지며 이내 그를 삼켜 버리려는 순간…
…여왕은 불길을 거두었다. 켄지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서약의 법칙 주문이 기도와 심장을 움켜쥐었다. 켄지는 거칠게 기침을 토해내며 나약하게 땅 위로 쓰러졌다.
여왕이 그 곁으로 가까이 날아가 쓰러진 몸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자는 사랑하는 것을 지킬 때, 그 무엇보다 강해지는 법이야.”
“…이젠 보호자 시늉을 하는 건가? 네 불길에 그대로 재가 되어 버린 무고한 이들은?”
“더는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겠어. 내 백성은 모두 살아갈 자격이 있으니까.”
말을 마친 여왕의 눈길은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전장에 쓰러져 죽어가는 병사를 향했다. 켄지를 떠나 병사에게 날아간 여왕이 푸른 불꽃에 새까맣게 타 버린 상처를 보고는 몸을 숙여 병사 옆에 무릎을 꿇은 채 블러드 힐링 주문을 외웠다.
저 멀리에서 켄지가 여왕을 비웃으며 외쳤다.
“흐흐, 성인군자 납셨군. 하지만 적응하지 못한 자는 죽는다. 약자는 강자의 먹잇감일 뿐이야.”
그리고 순식간에 모든 것이 푸른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여왕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했다.
“이 북쪽 땅의 색은 푸른색이다. 그걸 잊었나, 찬탈자?”
날개를 채 펼치기도 전에 거대한 푸른빛 덩굴이 땅에서 튀어나와 여왕을 옭아맸다. 또 다른 덩굴은 부상당한 병사를 덮쳤고, 병사는 전장의 땅속으로 흔적도 없이 파묻혀 버렸다.
덩굴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땅바닥에 박힌 여왕은 자기 자신과 병사, 왕국을 향한 울음을 토했다.
다시 일어선 켄지가 푸른 불꽃 칼날을 앞뒤로 흔들며 다가왔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낙원이라니, 웃기는 소리야. 자연엔 법칙이 있어. 생명의 순환을 거스르는 일은 결코 성공할 수 없지.”
수많은 푸른빛 나뭇가지, 기류, 전격, 불꽃, 물줄기가 땅 위로 튀어나와 켄지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여왕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그의 몸은 푸른색 빛을 내기 시작했다.
“너희 오지랖 넓은 여신이 수천 년 동안 북쪽 땅을 일군 고결한 푸른 피를 이길 줄 알았나? 이 푸른 땅 위에서?”
간신히 숨을 고르며 목숨줄을 잡고 있는 여왕 앞으로 다가온 켄지가 푸른 불꽃 칼날을 여왕의 목에 들이밀었다.
“낙원 놀이는 여기서 끝이다. 크로우를 내놔.”
여왕은 침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크로우는 네 소유가 아니야. 자기 의지를 따르는 아이지. 까마귀는 원하는 곳을 향해 얼마든지 날아갈 수 있어.”
“그 녀석은 내—”
그때, 나비 모양 드레스를 입은 전사가 꽃으로 덮인 창을 섬광처럼 켄지의 심장을 향해 찔러 넣었다. 폭풍에 꽃잎이 흩날리듯 드레스 자락이 휘날렸다.
린!
하나 켄지는 허벅지만 긁히며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일격을 회피했다. 린은 곧바로 자세를 가다듬고 다음 공격을 준비했지만, 커다란 덩굴에 강타당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허공에 던져졌다.
린은 창으로 땅을 짚고 일어났다. 고개를 들고 켄지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려는 순간, 엄청난 힘이 순식간에 등을 짓눌렀다. 너무나 강력한 힘 앞에 린의 몸이 전장의 대지 위로 으스러졌다. 장기와 뼈가 박살 나는 끔찍한 고통과 함께 입 밖으로 터져 나온 피가 웅덩이처럼 고였다. 나비 떼가 피에 빠져 퍼덕이는 듯했다.
“다시는… 않겠어…”
켄지는 린을 짓밟은 발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 몸을 숙여 흙 속에 파묻힌 린의 목을 움켜쥔 채 그대로 공중에 들어 올렸다. 여왕이 거친 숨으로 토해내는 울음이 죽음의 기운으로 덮인 전장에 나지막하게 울렸다.
“뭐라고 했지?”
린의 목을 따라 흘러내리는 피와 눈물이 검은 드레스를 타고 내려와 나비 날개를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다시는… 그 애를 다치게 하지 않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켄지의 눈이 크게 벌어지며 푸른색 분노가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눈물처럼 떨어지는 푸른 불길이 목을 타고 갑옷을 지나 팔로 흘러 그의 손목으로 고였다.
-성내-
난 창문으로 모든 것을 지켜봤다. 뺨을 타고 절망의 눈물이 흘렀고,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왜 날 여기 가둔 거야… 린…?
‘왜 저를 위해 싸우러 나가셨나요… 여왕님…?’
‘왜 아직도 저 사람, 켄지를 두려워하는 거지…?’
‘크로우, 넌 왜 이렇게 무력한 거야…?’
‘도대체 왜…?’
‘영원히 린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
‘왜 아직도 불평하고 두려워하기만 하는 거야?’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생각해 내, 크로우!’
‘망설이지 말라고, 크로우!’
‘당장 움직여, 크로우!’
‘자기 자신을 의심하면서 겁쟁치처럼 굴지 말란 말이야, 크로우!’
‘날아올라!’
‘크로우!’
…
…
나는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창문 유리가 성 밖으로 비처럼 쏟아졌다.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거칠고 자유롭게 휘날렸다.
나는 까마귀처럼 검은빛의 거대한 낫을 움켜쥐고 공중으로 뛰어 켄지를 향해, 린을 향해, 여왕님을 향해 날아올랐다.
이제 두렵지 않아. 더는 망설이지 않아.
그 순간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사랑과 희망뿐이었다. 린의 미소 짓는 얼굴, 다정한 목소리, 작은 손, 내 입 안에 린이 넣어 주던 달콤한 케이크의 맛.
나는 미소 지었다.
켄지의 뒤편에 착지한 나는 온 힘을 다해 낫을 휘둘러…
[켄지의 심장을 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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