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우의 장 : 2-4

Jan 12, 2023

머리카락과 어깨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흙 내음과 섞인 피 냄새가 콧속을 채웠다.

 

눈을 뜨고 어디에 있는 건지 살펴보니… 기억의 성 안이었다.

 

시체. 잘린 살점. 튀어나온 뼈. 난 송장 산 위에 혼자 무릎을 꿇었다. 죽은 이들이 누군지 잊지 않았다. 가짜 알약을 팔던 악덕 상인, 잔뜩 취해 마을 소녀들을 강제로 범한 귀족, 권력욕에 찌들어 더 직급이 높은 경비대원이 되려고 경쟁 상대를 모함했던 기사, 켄지의 명령을 받고 내 손으로 죽였지만 정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가여운 영혼들까지.

모두가 죽은 채로 그곳에 누워 있었다.

 

‘사람을 많이 죽이면 이렇게 되는구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자유로워질 줄 알았어? 마지막 순간엔 평화와 사랑을 누릴 줄 알았냐고?’

 

‘내가 빚은 지옥이야. 이래도 싸.’

 

‘이 죽은 이들도 누군가의 아버지, 남편, 아들이었겠지.’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부수고, 비통한 비명 속에서 통곡을 쥐어짜고, 증오를 뿌렸었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뺨을 타고 무릎 위로 떨어졌다. 눈물은 빗방울과 섞여 흘렀고, 빗방울은 눈물과 섞여 내렸다.

 

‘난 절대 자유로워질 수 없겠지.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고문당해도 싸.’

 

‘영원히.’

 

‘만약…’

 

‘불타는 숲에서 켄지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필요 없어!”라고 외쳤다면.’

‘스스로 행동할 용기가 있었다면.’

‘아예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많은 사람들을 상처 입히지 않았다면.’

‘이 찔리고, 베이고, 후려치고, 잘리고, 꿰뚫리고, 꿰이고, 구멍 나고, 들이받히고, 관통당하고, 욱신거리고, 뚫리고, 절단되고, 조각나고, 꽂히는 고통이 없다면!’

 

눈물이 빗속에 섞여 흘러넘쳤다. 더는 목소리를 억누를 수 없었다.

 

‘아무도 없잖아? 울어도 되는 거 아니야?’

 

‘울어도 된다고…’

 

난 무너지듯 주저앉아 바람과 비와 흙과 피에 울음을 토했다.

고통과 절망과 후회에 빠진 채로…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부드럽고, 따뜻하고,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누구지? 도대체 누구길래 이런 내 마음속을 엿보고도 날 안아주는 거야?’

 

난 속삭이며 말했다.

 

“내가 무섭지 않은 거예요?”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가 답했다.

 

“전혀.”

 

“난 악랄한 살인마라고요.”

 

“하지만 마음속 깊숙한 곳에 다정함을 품고 있지.”

 

“다정함이요…?”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 죽일 수밖에 없던 거야. 선택지가 더 많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 너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잖아.”

 

‘내가?’

 

“어쩌면… 그저 제가 저질렀던 일을 만회하려고 이러는 걸지도 몰라요.”

 

포옹이 더 부드럽고, 더 따뜻하고, 더 다정해졌다.

 

“아이야, 과거에 사로잡히지 마. 흘러간 과거는 어찌할 수 없어. 이 순간에 바라는 일을 하렴. 현재를 사는 거야. 지금 무엇을 하고 싶니?”

 

“…제가 하고 싶은 거요…?”

 

이런 질문은 받아 본 적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을 정한다는 자유는 누려 본 적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저는…”

 

난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단순하고 바보 같을지 모르지만, 친구랑 함께 웃고 싶네요.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고요. 햇빛 아래 물결치는 냇가랑 반짝이는 자갈밭도 보고 싶어요. 아침이 되어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도 듣고, 어린나무랑 오래된 나무에서 딴 열매도 먹고 싶어요. 비 오는 날엔 흠뻑 젖은 채로 뛰어놀고, 눈 오는 날엔 양발이 눈 속에 잠길 때까지 가만히 서 있고 싶어요. 봄이 오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꽃잎을 맞고 싶고요. 아직… 더 살고… 싶어요.”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목소리가 답했다.

“그럼 더 살아가렴.”

 

난 그 말을 믿지 못하고 고개를 휘저으며 말했다.

 

“저 같은 사람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더 살아갈 수 있어요?”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건 오직 너밖에 없단다, 아이야. 너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니? 과거를 짊어지고 살아갈 만큼 용기를 낼 수 있겠니?”

 

저는…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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