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우의 장 : 1-2

Nov 30, 2022

여왕님의 이름 아래, 온 힘을 담아 휘두른 레이피어가 검은 옷을 입은 소녀의 사나운 자벨린과 부딪혔다. 송곳니 한 쌍처럼 갈라진 자벨린 날과 레이피어 도신, 두 금속이 충돌하며 불똥이 튀었다. 태양 빛보다 밝은 그 분노가 확장된 동공에 비쳤다.

 

“……!”

 

한 줄기 피가 뿜어져 나오며 목에서부터 꿰뚫는 듯한 통증이 퍼졌다. 사그라드는 불똥 속에서 필사적으로 목을 붙들자, 전투로 해어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가 느껴졌다. 난 레이피어를 놓친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한 송이 장미처럼 밝은 핏빛으로 물드는 흰색 드레스 자락에 시선이 닿았다.

 

목에서 뿜어져 나온 핏줄기는 붉은 폭우처럼 쏟아져 바다를 이루며 내 시야를 가렸다.

 

비명을 지르고 싶다. 

 

입을 열었으나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말을 뱉을 수 없었다. 누군가를 부르기는커녕 한 마디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피와 재로 가득한 전쟁의 소리만이 내 목소리를 대신할 뿐.

 

다시 일어나려 움찔거리던 나는 복부에 꽂히는 거친 발길질을 맞고 뒤로 내동댕이쳐졌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자벨린을 휘두르며 날 끝에 묻은 피를 털어 내는 게 보였다.

 

‘내 피잖아.’

 

눈앞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전장, 연기, 화염, 하늘이 함께 녹아내려 형형색색의 혼돈을 담은 만화경이 되었다. 무수한 만화경이 펼쳐져 시야를 걷잡을 수도 없이 뒤흔들었다. 은반지와 붉은 눈과 황금 왕관과 푸른 들판과 검은 까마귀가 보였다.

 

빙빙 돌며 뒤틀리는 시야와 함께 귓가에 울리는 소리가 죽음을 떠올리게 했다. 두 귀를 막고 싶었다. 그것보다 두 눈을 먼저, 아니, 피범벅이 된 목을 잡고 출혈부터 막아야 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싸움에 갈가리 찢기고 문드러진 흙먼지에 도로 엎어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뭔가 말하는 것이 희미하게 들렸지만, 귓가에 울리는 소리 때문에 소녀가 비웃으며 내는 목소리는 그저 ‘까악’ 하는 울음소리로 느껴질 뿐이었다.

 

난잡하게 얽힌 형형색색의 만화경 무늬가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으며 소리조차 없이 고요한 공허가 찾아왔다.

 

‘너무 조용해.’

 

상태가 나아진 듯했다. 뭔가…

 

‘편안해….’

 

큰 소리는 귀와 뇌를 으깨 버릴 수 있다던 레너드의 말이 떠올랐다. 

 

‘너무 무서운 얘기야.’

 

‘지금, 이 상태가 훨씬 좋아.’

 

편안하게 암흑을 받아들였다. 무섭게 울리는 소리 없이 침묵만이 남았다. 목에서 느껴지던 지독한 통증도, 입 안에서 느껴지던 피 맛도, 머리를 반으로 쪼갤 것 같던 두통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지금이 훨씬 좋아.’

‘그 무엇보다도.’

 

‘평화로워.’

 

‘행복해.’

 

‘영원히… 이렇게 있고 싶어.’

 

……

………

‘여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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