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우의 장 : 2-1

Dec 16, 2022

C.E. 995년 겨울

 

우거진 숲 한 가운데에 있는 낡은 오두막 위로 눈이 흩날렸다. 떨어지는 눈은 죽은 풀잎부터 삐걱거리는 오두막 지붕까지 모든 것을 덮었고, 몇 달 뒤에나 있을 태양과 올릴 결혼식을 기다리는 숲은 순백의 드레스를 입었다. 카앙. 쿠웅. 치익. 강철이 부딪히고 날을 가는 소리가 오두막 밖으로 퍼져 나가 고요한 허공을 채웠다. 

 

다람쥐나 사슴 같은 짐승이 근처에서 거리를 두며 서성였다. 짐승들은 이 숲을 안식처 삼았으나, 오두막에는 가까이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오두막 안에서는…

 

“그냥 녹아서 죽게 두면 안 돼요? 피곤해… 피곤하단 말이야!”

 

나는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두통을 느끼며 말했다. 악몽 말고도 낯선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난 여왕님의 기사야.”

‘무슨 여왕?’

강철과 금속을 정제하고 갈며 나는 카앙, 쿠웅, 치익 소리를 셌다.

 

“시키는 대로 표적을 죽이지 못하게 되면 죽게 해 주지.”

 

화덕 위로 몸을 굽힌 채로 켄지가 장검을 두들기며 말했다. 켄지는 망치를 내리칠 때마다 게으름 피우는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가벼운 농담이 아니었다. 네어 시민으로 태어난 이상, 생명을 유지하려면 블러드스톤으로 만든 알약을 먹어야만 했다. 알약을 먹지 않으면 몸과 영혼은 살점 덩어리로 녹아내렸다.

 

“고대 여신한테 저주를 받아서 이렇게 됐다고들 하잖아요. 그거 살 가치가 없다는 뜻 아니에요?”

 

칼날을 세우느라 나던 소리가 갑자기 뚝 그쳤다.

 

“그럴지도 모르지. 다른 생명의 관점으로 보면 살 가치가 분명한 것은 없어. 오직 자기 목숨만 소중할 뿐이야.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다 소용없지. 까먹지 마라.”

 

“그럼 지금 당장 우리끼리 서로 죽이지 그래요? 안 그럴 이유라도 있어요?”

 

“계속 내 인내심을 시험하면 알게 될걸.”

 

켄지는 다시 장검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성을 높이며 내게 물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실패했지?”

 

난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수십 번은 될걸요? 그냥 죽이지 그래요?”

팔짱 낀 팔의 손가락에 더 세게 힘을 주며 말했다.

 

“내가 유용해서 그래요? 조종할 수 있으니까?”

 

카앙. 쿠웅. 치익.

 

“넌 내가 가진 무기지, 생명체가 아니야.”

 

“헤… 그 무기가 오늘 녹을 준비 다 됐다고 하네요. 화덕 온도가 충분한가 몰라⁠— …!”

 

켄지의 차가운 손이 쉽게 부러뜨릴 듯이 내 목을 졸랐다. 얼음 기둥처럼 선 켄지의 음침하고 창백한 얼굴이 내 눈에 가득 담겼다. 숲에 내리는 눈보다도 차가웠다. 너무나도 가까이 선 나머지 켄지의 머리칼이 내 얼굴을 덮을 정도였다. 난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내가 널 기른 건 오로지 무기로 쓰기 위해서야, 크로우.”

 

켄지는 느릿하게 말을 뱉으며 내 목을 놓았다. 붉으락푸르락하게 멍 자국이 남았다.

 

“너한테 선택권은 없어.”

 

난 거칠게 기침하며 차갑기 그지없는 공기를 들이켰다. 하얀 머리카락을 흔들며 숨을 헐떡이는 동안, 켄지가 불어넣은 냉기와 공포로 온몸이 떨려 오는 바람에 입고 있던 검은 드레스가 쪼그라든 것처럼 느껴졌다. 고통스러운 몇 초가 흐른 뒤, 난 용기를 쥐어짜 말을 던졌다.

 

“제가 바랐던 것처럼… 거의 죽일 뻔했네요.”

 

켄지의 분노가 폭발해 두 눈에 파란 불꽃이 서렸다. 그 모습에 말로는 설명 못 할 고통과 영혼 깊숙한 곳에 묻힌 공포가 떠올랐다.

 

‘날 죽이진 않을 거야. 대신 내가 굴복할 때까지 몸과 영혼을 고문해서 결국 자기 명령대로 싸우게 하겠지.’

 

“10년 전 불타는 숲에서 널 살려줬지. 그때부터 네 영혼은 내 거였어. 이제 말 잘 듣는 무기답게 입 닥치고 자리에 앉기나 해.”

 

말을 끝낸 켄지는 화덕 앞으로 돌아가 열기를 올렸다.

 

카앙. 쿠웅. 치익.

 

켄지 말이 맞았다. 구체적으로 기억할 순 없어도 붉은 화염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불타는 나무, 뜨거운 공기,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 통증으로 욱신거리는 가슴과 머리. 절박함과 생존 본능으로 지나가던 이에게 목숨을 구걸했고 그 대가로 어떤 부탁이든 따르기로 했었다.

 

‘끔찍한 일을 무수히 겪었으면서 왜 죽음을 두려워했던 걸까?’

 

‘그때 난 살 만한 가치가 있긴 했을까?’

 

‘뭐 때문에 살아가는 거지?’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자유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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