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우의 장 : 2-5

Jan 26, 2023

C.E. 996년 봄

 

“얘들아, 디저트 먹으렴! 너희가 제일 좋아하는 걸로 준비했어!”

 

천사가 땅에 내려온 듯한 모습으로 여왕님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나와 내 창술 선생님인 린을 보러 훈련장에 들어오셨다.

 

“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휙!

하지만 엘비니아에서 제일가는 말괄량이 고양이인 히나가 처마에서 뛰어내려 내 디저트를 물어 가 버렸다!

 

“이 똥 고양이가!!”

 

필사적으로 디저트를 되찾으려고 히나를 쫓아 훈련장을 쏘다니는 나를 보며 여왕님이 말씀하셨다.

 

“크로우가 처음 왔을 때랑 비슷하구나.”

 

“그러게요! 그땐 제가 크로우를 쫓아다녔죠. 마지못해 마음을 여는 고양이처럼 부끄럼이 많았어요. 저나 여왕님, 경비병도 모자라 자기 그림자를 피해 도망치기도 했잖아요! 그러다 항상 맛있는 걸로 유인하면 돌아왔고요. 그랬던 애가 이제 고양이를 쫓아다니네요. 시간이 참 빨라요.”

 

난 빈손으로 린과 여왕님 곁으로 돌아갔다.

 

“나 좀 그만 놀려~!”

 

부끄러운 마음에 흙먼지를 차며 훈련장을 바라봤다.

 

“다 처음 먹어 보는 것들이었단 말이야! 그렇게 맛있는 게 있는 줄도 전혀 몰랐다고!”

 

린과 여왕님이 함께 함박웃음을 지었다.

 

“음식이 전부가 아니에요. 전 세상에 이렇게 많은 감정, 기분이 있는지도 몰랐거든요. 지금도 새로운 걸 느끼고 있어요. 무기가 아닌 다른 존재… 다른 사람으로서 처음 느껴보는 좋은 감정이에요.”

 

나는 여왕님 앞에 무릎을 숙여 앉았다.

 

“절 구해 주시고, 받아들여, 삶의 의미를 주신 여왕님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인사를 끝낸 뒤 일어나서 희망으로 가득 차 다채로운 빛을 내는 린의 눈을 바라봤다.

 

“린, 내게 인생은 일하고, 주린 배를 채우고, 잠자는 게 다가 아니란 걸 알려줘서 고마워. 네 덕분에 사랑, 시, 드레스, 낯간지러운 말이랑 장난까지 배웠어.”

 

린이 활짝 웃는 얼굴로 화답했고, 여왕님도 고결한 미소를 지어 주시니 마음이 안정됐다. 켄지에게서 벗어났다곤 하지만 아직도 심장 어딘가에 박힌 공포의 송곳니에 대한 두려움은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내 아이야,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된단다.”

 

“까마귀는 무릎 숙이기 같은 거 안 하거든? 바보!”

 

난 그 말에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그러네. 일일이 말로 표현하기엔 오글거려. 근데 다 너한테 배운 거거든요, 나비 아가씨!”

 

린이 무릎 인사를 하며 연극 하듯 말했다.

“하핫, 알았소이다! 그럼 이제 그대 삶의 의미가 뭔지, 창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복습하도록 하지요!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야 하니까!”

 

훈련용 창을 재빠르게 집어 들고 자세를 잡은 뒤 답했다.

 

“또 놀리는 거 봐!”

 

훈련용 창을 든 린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데도, 왜 훈련해야 하는지, 왜 창술을 배워야만 하는지 안다.

 

바로 전쟁 때문에.

 

“여왕님, 정말 블러드스톤 때문에 이웃 나라와 전쟁을 벌이실 건가요?”

 

그 질문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던 기억이 살아났다.

 

-숲속에 있는 오두막-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에 에워싸인 켄지의 오두막. 어둠을 비추던 따뜻한 모닥불은 추위를 막아 내기엔 턱없이 작았다. 난 어떻게든 몸을 데울 생각에 불 위로 손을 모았다. 불빛에 켄지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동물 목숨 구하자고 정말로 사람을 죽여야 해요?”

 

내 질문에 켄지가 답했다.

“목숨의 가치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벌레이든 다 똑같아. 이 숲의 지킴이로서 내가 신경 쓰는 건 이 숲에 사는 생명뿐이야. 이 숲만 안전하고 평온하게 남을 수 있다면 네 고향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이 불타 없어져도 상관없어.”

 

-성내 훈련장-

 

마침내 알게 된 삶의 의미가 그렇게나 싫어하던 예전 삶, 한 생명을 구하려고 다른 생명을 죽이는 방식과 같은 것일까?

 

“내 아이들아, 너희가 삶을 이어 나갈 수만 있다면, 그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뭐든지 할 거란다. 그게 악을 행하는 길이라면…”

 

여왕님은 눈살을 찌푸리며 두 눈을 감고 말씀하셨다.

 

“…기꺼이 악인이 될 거야.”

 

여왕님이 눈을 뜨고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셨다. 켄지와 여왕님은 분명히 다르다는 걸 진심으로 느꼈다. 켄지에겐 본인만의 정의를 따르는 것만이 중요한 일이었다. 하나 여왕님에게 중요한 건 당신의 안위가 아닌 나와 린과 백성이었다.

 

“우리 예쁜이, 펑펑 울 것 같은 표정 짓지 말고 거기까지만 하자! 연습해야지! 해 지기 전까지 한 번이라도 공격에 성공하면 이따 밤에 디저트 줄게! 못 하면… 헤헤, 내일 그 검정 드레스 대신 귀여운 인형 옷 입힐 거야!”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린 후, 양손에 창을 움켜쥐고 훈련장을 가로질러 린을 향해 내달렸다. 만약 여신님이 정말 존재한다면, 소원을 하나 빌고 싶었다.

‘전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블러드스톤 문제를 해결하게 해 주세요.’

시체 더미 위에서 눈물 흘리는 꿈을 더는 꾸고 싶지 않아 비는 소원이 아니었다. 더는 적에게서 사랑하는 이와 미소를 빼앗게끔 내몰리고 싶지 않아 비는 소원도 아니었다. 그저 여왕님이 이 모든 죄를 짊어지길 원치 않는 마음에 비는 소원일 뿐이었다.

 

여왕님이 빛을 잃고 어둠에 빠져… 악이 되지 않도록.

진심을 다한 소원이었다.

 

-그날 밤-

-성내 훈련장-

 

나는 린과 함께 나란히 누워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봤다. 밝은 달이 뿌리는 빛과 모닥불이 타닥거리며 내는 빛이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귀여운 드레스는 인형한테 입혀야겠네. 방에 남은 인형이 있던가?”

 

“너 닮은 인형 새로 만들 거야!”

 

우린 웃음을 터뜨리며 끝없는 별의 바다가 펼쳐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있지….”

 

“응?”

 

“나, 여왕님이 삶의 의미를 주신 게 정말 기뻐. 그렇지만 정말 날 구원하고 내게 더 살아갈 마음을 심어 준 건 바로 너야, 린. 친구는 네가 처음이었어. 살면서 처음으로 사랑, 호의, 안락함, 의지, 소속감을 느꼈지. 내 전부를 바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말이야.”

 

린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그 눈동자 속에서 모닥불이 타닥거렸다.

 

“정말 전쟁이 일어난다면… 널 잃게 될까 봐… 모든 걸 잃게 될까 봐 두려워. 나한텐 지금 이 모든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일이거든. 다, 다시 옛날처럼… 감정 없이 살인만 저지르던 때로 돌아가게 될까 봐 무서워. 너한테 그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전쟁에서 네가 다치는 것도 바라지 않아. 내가 지켜줄게.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거야…”

 

린은 간절히 말하는 내게 몸을 가까이 붙이고 부드럽게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아직 미소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진정해, 예쁜 아기 새. 다 괜찮을 거야. 잘 들어 봐. 모닥불 소리, 귀뚜라미 울음, 너랑 내 심장 소리도 들리지? 오늘 밤엔 전쟁이나 블러드스톤 걱정 그만하고 싶어. 내일 쓸 블러드스톤이 없어서 녹아 죽는다 해도 우리 둘이 함께 있잖아. 저 하늘에 빛나는 별 좀 볼래? 정말 아름답지? 고민 그만하고 같이 노래나 부르자. 응?”

 

나는…

[진심으로 영원토록 린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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