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우의 장 : 2-2

Dec 21, 2022

‘여기 있으면 평생 켄지한테 조종당하며 살겠지. 도망치면? 자유로워지겠지만 블러드스톤이 없어서 하루면 죽을 거야.’

 

‘하지만 죽는 게 뭐가 어때서? 공기, 물, 불, 땅처럼 삶과 죽음이 있어야 비로소 세상이 완벽해지는걸.’

 

‘죽는 게 무서워서 이러는 걸까? 아니, 전혀 무섭지 않아. 내 칼날에 비명 지르며 울부짖고 죽는 사람들을 끝도 없이 봤잖아. 나 같은 건 진작에 죽었어야 했어.’

 

“알아서 갈래, 아니면 가게 만들어 줄까?”

 

켄지의 차디찬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알았어요, 알았어. 가면 되잖아요, 사랑과 평화 나으리!”

 

자리를 뜨며 비꼬는 말에도 켄지는 대꾸 한마디 없이 계속 칼날을 갈았다.

 

나는 코트를 입고 터덜터덜 걸으며 눈 쌓은 숲길을 뚫고 노바에 도착했다. 성까지 가려면 지나야 하는 마을이다.

 

마을 길을 걸으며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물건을 사고팔며 이야기하고 웃음 짓는 사람들. 매일 블러드스톤을 먹지 않아도 녹아내리는 일 따윈 없을 것처럼 보였다.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절박한 수단이었지만, 네어 사람들은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시장과 빵집을 지나 성 입구 앞 다리에 도착했다. 강철로 된 다리가 성을 두른 수정같이 푸른 못 위로 내려져 있었다. 온갖 종류의 물고기가 헤엄치는 못의 수면에 성이 뚜렷하게 비쳤다.

 

수정으로 보호되고 있는 블러드스톤 배급소에 가까이 가자 엄중하게 무장한 여기사 하나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번호는?”

 

“744요.”


여왕님의 은혜로 모든 시민은 블러드스톤으로 만든 알약을 하루에 한 알씩 받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한 번도 녹아 죽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여왕님이 얼마나 백성을 신경 쓰시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얼굴을 보여라.”

 

한숨을 픽 내쉬며 기사를 향해 얼굴을 들었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켄지와 내가 먹을 알약 2개를 꺼냈다.

 

“여왕님께서 너희같이 예절도 모르는 것들을 챙기느라 전쟁을 벌일 생각을 하신다니, 어이가 없군.”

 

“소문이 사실이에요?”

 

“무슨 소문?”

 

난 입술을 살짝 물면서 웃음을 짓곤 말했다.

 

“흐음, 글쎄요… 블러드스톤이 모자라서 여왕님이 옆 나라랑 전쟁을 벌이신다는 소문일까나?”

 

그리고 알약을 챙기러 다가가자, 기사는 주먹을 쥐었다.

 

“소문 따위에 여왕님의 시간을 낭비할 생각 없다. 진실만 알려주지. 첫째, 도시 주민이 사라지고 있다. 둘째, 주민이 먹을 약도 사라지고 있다.”

 

말을 계속 이으며 기사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셋째, 너는 숲에 숨은 그 남자 때문에 알약을 하나 더 받아 간다. 넷째, 그 남자는 네어의 전 사령관으로 우리보다 블러드스톤에 대해 더 잘 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기사는 말을 이었다.

 

“다섯째, 지난 몇 년 동안 그 남자를 본 사람은 없다. 여섯째, 악은 그림자 속에 숨어 때를 기다린다. 내가 아는 건 이 정도인데, 내가 지금 상황에 대해 아는 건 얼마나 될까?”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냥 매일 약 타러 오는 것뿐인데. 제가 도둑질하면서 블러드스톤을 빼돌렸으면 여기까지 잘나신 기사님 상판을 보러 오기나 하겠어요?”

 

기사는 코웃음을 지었다.

 

“그자가 약속을 지키고 노바 땅을 다시는 밟지 않는 한, 무슨 짓을 꾸미든 상관없어. 약속을 어기면 붉은 화염에 휩싸여 재가 될 테니까.”

 

말이 끝난 후 기사가 주먹을 펴자, 나는 빼앗듯이 알약을 낚아챈 뒤 한쪽 눈을 찡긋대고는 새침하게 자리를 떠났다.

 

진실이라? 나도 알고 있었다. 지나칠 만큼 말이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낼 생각은 없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지.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다 집어치우라 해. 집에 안 갈 거야.’

 

숲으로 걸어가던 나는 방향을 틀어 강둑을 따라 오두막에서 점점 멀어졌다. 자유를 쫓는 발걸음이었다.

눈 내린 숲을 걸으며 소나무 향과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나비가 팔락이는 날갯짓을 마주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눈길을 끄는 나비 떼의 모습에서 전에 꿨던 꿈이 생각났다. 흐릿하지만 설명 못 할 끌림을 느꼈다. 그래, 아름다우면서도 뭔가… 운명 같은 느낌이랄까?

 

나비 떼의 인도를 따라 날아가자, 그곳엔…

 

…!!!

 

심각하게 상처 입고 쓰러져 있는 한 소녀를 보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화살 두 개에 꿰뚫린 등에서 나온 피가 눈 위로 흘러 굳은 모습이 마치 진홍색… 나비 날개처럼 보였다.

 

소녀는 의식을 잃었는데도 품 안엔 고양이 한 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무언가로부터 고양이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한 게 틀림없었다. 고양이가 날 쳐다봤다.

 

‘위험해. 누구한테 쫓긴 거지?’

 

‘쫓긴 건 어느 쪽이고? 이 여자애? 아니면 고양이?’

 

‘아니, 그 전에 이대로 두면 이 애가 죽을 거야…!’

 

‘빨리…’

 

[상처를 치료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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